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지속되는 혼란 ==== 예루살렘 왕국의 의회는 왕국의 수도를 임시로 [[티레]]로 천도했다. 1188년 6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과 십자군 귀족들은 살라흐 앗 딘에 다시는 대항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는데 석방되자마자 맹세를 준수할 의무를 면제받았다. 하지만 기 드 뤼지냥에 대한 왕국 기사들의 분노는 상당해서 왕임에도 불구하고 티레의 성주 코라도 델 몬페라토(Corrado del Monferrato)는 기가 입성하여 성의 통제권을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 어쩔수 없이 그는 맨땅에서 노숙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다 3차 십자군이 선포되었음을 듣고 그들을 마중나가서 배알도 없이 자신을 유럽에서 추방시켰던 악연으로 일면식이 있던 [[리처드 1세]]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국왕과 티레의 영주의 다툼에 크게 놀랐고 상황을 모르던 그들은 모두 기 드 뤼지냥의 편을 들어주었다. 피사에서 온 십자군들이 기 드 뤼지냥을 따를 것을 맹세하자 기 드 뤼지냥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프랑스 국왕 필립이 공성 중이던 아크레에 참가한다. 아크레의 수비군은 십자군의 몇 배에 달했고 공격은 무의미해 보였지만 리처드가 무슬림 해군 지원군 수천명을 수장시키며 해로로 들이닥치자 몇개월간 지체되던 공성전이 한방에 끝난다. 이는 전략적으로는 엉망이었지만 기에게는 정치적으론 대성공이었는데 기 드 뤼지냥의 아크레 공격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 드 뤼지냥은 부하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이교도에 맞서는 위대한 십자군의 기사의 이미지를 얻었고 이에 감동받은 십자군들이 앞을 다투어 기에게 합류하면서 코라도는 병신이 되었고 기는 대단한 위신을 얻었다. 결국 코라도도 1189년 9월 기의 공격에 합류했고 1190년에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10월 7일 독일 십자군의 잔여 세력까지 기에게 합류하면서 기의 보잘것없는 군대는 대군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190년 7월 15일 시빌라와 기와 시빌라의 친딸 두 명이 함께 사망하자 모든 상황이 급변했다. 기 드 뤼지냥의 왕권은 시빌라 여왕과의 결혼에 의해서 계약된 부군이라는 자리였기에 합법적으로 왕관은 시빌라의 배다른 동생 이사벨에게로 돌아 가야 했다. 게다가 3차 십자군 내에서도 리처드 1세를 견제하려고 리처드의 편으로 분류된 기를 프랑스 국왕과 독일 십자군들은 점점 기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왕국 고위층의 판단과 십자군들의 의향에 따라 왕관의 운명을 정해지는건 시간 문제였다. 문제는 이사벨의 남편인 옹프루아 드 토롱(Onfroy de Toron)이 기 드 뤼지냥보다 더 못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회의를 하면서도 [[사라센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절체절명의 왕국 상황을 시정할 수있는 왕이 필요했고, 그 대안으론 코라도 델 몬페라토(Corrado del Monferrato)가 급부상했다. 그러나 왕실 밖에서 왕을 선택하면 또다른 분쟁과 내전이 생길 수밖에 없기에 의회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사벨에게 옹프루아와의 결혼식을 취소하고 코라도 델 몬페라토와 결혼하시자는 제안을 그녀에게 했다. 그러나 아직 십대였던 이사벨은 남편 옹프루아를 사랑했던지 아버지뻘 연상인 코라도에 식겁했던지 이러한 정치적 고려에 따르기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마리아 콤네네[* [[이벨린의 발리앙]]과 재혼한 상태이기도 했다.]까지 나서서 이사벨에게 정치적인 결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 결국 교황청의 대법관이자 [[피사]] 대주교인 우발도(Ubaldo)는 이사벨과 옹프루아 부부의 결혼 생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여 결혼 당시에 이사벨이 고작 11세 밖에 되지 않았으며, 법적 나이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결혼을 무효화 할 것을 선포했다. 옹프루아는 이 결정에 항의하려고 시도하지만, 왕국의 사주를 받은 프랑스 기사인 기 드 상리스(Guy de Senlis)가 재빨리 결투 도전을 걸어왔다. 사실 재판 과정에서 판단하기 힘들 때 중간 합의점으로써 하던 것이 바로 이 중세의 결투이다. 이 시대 결투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뭐 복잡한 재판이야 어찌됐건 그리스도께서 알아서 도와주실 테니, 진 놈은 신이 저버린 악한 놈이고 이긴 놈이 신께서 손을 들어주신 선한 놈." 이다. 이 결투 재판은 아예 법으로 정해져 있으며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몸값을 지불해 풀려날 수는 있지만 돈이 궁하지 않는 이상 후환이 찝찝하기도 하고 혹은 복수를 위해 진 놈을 죽여버리는게 일반적이었기에, 왕권은 커녕 목숨이 날라갈 지경에 이르자 옹프루아는 그를 만나기를 거부하고 --시발 안해-- 같은 처지의 기 드 뤼지냥과 합류해 버린다. 1190년 11월 24일 이사벨은 주변의 뜻대로 코라도 델 몬페라토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에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가 하객으로 참가했다. 콘라도와 기 사이의 왕위 경쟁은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대리전 같은 양상이었다. 1192년 4월, 필리프 2세가 성지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버렸다. 유럽에 돌아가서 허튼 짓, 영국에 빈집털이하지 않겠노라라는 맹세까지 리처드 1세와 하고 떠났다. 그러자 필리프 2세를 견제하려고 기를 지지한 리처드 1세는 그가 돌아가자 감정이 아닌 이성이 몸을 지배했는지 얼마 가지 않아 콘라드를 왕으로 인정했다. 이렇게 기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대신 [[리처드 1세]]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아 그가 성지로 오다가 함락시킨 [[키프로스]]를 받아 키프로스 왕국을 건국한다. *''' 이사벨 1세 & 콘라드 1세 ''' [[1192년]] 4월 무려 2년 가까이 예루살렘의 왕관이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마침내 시빌라의 이복 동생 [[이사벨 1세(예루살렘 왕국)|이사벨 1세]]가 뒤를 이었다. 티레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이사벨은 [[이사벨 1세(예루살렘 왕국)|이사벨 1세]]로 등극하고 새 남편 코라도도 [[콘라드 1세]]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이사벨의 의붓 아버지였던 발리앙 디블랭은 코라도와 이사벨의 결혼을 적극 지지했는데 코라도의 전투 실력이 매우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하틴 전투 이후로 기의 병크 짓을 목도한 이유로 그는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인물보다 전투에 유능한 이가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둘러싸인 십자국 국가의 수호를 맡아야 한다는 것을 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잠시, 1192년 4월 28일 콘라드 1세는 티레의 거리에서 두 명의 [[아사신]]에게 허무하게 암살당한다. 그가 왕위에 오른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여기서 발리앙이 또 다시 움직인다. 순식간에 미망인이 된 이사벨을 이번에는 제 3차 십자군에 리처드 1세와 종군했던 상파뉴의 백작 앙리 드 블루아와 결혼시키기로 한 것이다. 콘라드 1세와 왕위 경쟁에서 패배하여 키프로스로 갔던 기의 귀환을 막기 위해 발빠르게 또다른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발리앙이 26세의 이 기사한테 주목한 이유는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전투 감각이 탁월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리처드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왕 필립과도 인척 관계였기 때문이다. 포위당한 십자군 국가에 유럽 두 강국과 혈연으로 연결된 인물을 왕으로 맞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었다. 당시 앙리는 아크레에 있었는데, 아스칼론에 있는 백부 리처드 1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는 리처드 1세와 함께 생사고락을 보내며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게 됐던 것이다. 그러자 리처드 1세는 기뻐하며 자신이 정복한 모든 땅을 양도하겠다며 흔쾌히 승낙한다. 이자벨 1세도 늙은 코라도보다야 그의 아들뻘인 세련된 26세의 앙리와의 결혼이 그래도 나았던지 전과는 달리 곧바로 승낙했다. 그들의 결혼식 겸 앙리의 대관식은 콘라드 1세가 살해된 지 불과 일주일 뒤에 거행되었다. 앙리는 직위에 걸맞은 의무를 충실히 따라, 예루살렘 국왕의 이름으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병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살라흐 앗 딘과의 전투에 임하겠다고 리처드 1세에게 맹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